나는 물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몸은 무겁게 부풀어 가라앉지도 뜨지도 않은 상태로 물결에 따라 흔들린다.
머릿속에 물이 고여들기 시작한다. 기억들은 물 위에 붕 뜬 채로 하나 둘 흩어져 마침내 작은 수포가 되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대로 내 몸 속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는 가벼운 껍데기로 떠올라 이 세상의 모든 바다를 표류할 것이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고 몸에 수 십 개의 물방울들을 매단 채 수화기를 들었다. 벨소리보다 쟁쟁한 Y의 목소리가 불만스럽게 귓속으로 튀어든다.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
까슬까슬한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습기 없는 구름이 뭉텅이로 떠 있는 바탕화면 위 번개모양 윈앰프를 클릭하고 IP주소를 입력한다.
“네에, 오늘도 날씨가 아주 쾌청한 걸요. 즐거운 주말, 아침은 이렇게 맑지만 오후에는 아마 저 변덕스러운 하늘이 실연을 당하고 한바탕 통곡을 할 것 같아요. 우산을 준비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럼, 신청곡 들려드리겠습니다. 이상은 씨의 ‘외롭고 웃긴 가게’ …”
차가운 물로 막 씻어놓은 앵두 같은 목소리의 여자 CJ가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을 들으며 방구석에 사과상자 한 가득 쌓여 있는 전단지를 문턱까지 끌고 나왔다. 며칠 전 아는 선배가 찜닭 집을 개업했다고 전단지 돌리는 일을 부탁했다. 시내 한복판에 나가 서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외롭고 웃긴 가게로 들어오세요, 오렌지 색 가발을 쓰고서…
시간은 흐르고 빛을 뿜어요, 새들이 헤엄 치듯이… 거짓말처럼… 거짓말처럼…
문턱에 걸터앉아 음악을 들으며 원두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어제 어머니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수도관이 터져서 방바닥이 습기로 가득 차서 그런데, 잠깐만 내려와 주면 안되겠냐고. 가고 싶지만… 나는 터진 수도관을 꿰맬 줄 모른다. 어머니는 머뭇거리며 아버지가 어젯밤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다고 덧붙였다. 나는 잠자코 있다가 근처에서 적당한 가게를 찾아 수리를 부탁하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는 설익은 삶을 살아왔다. 씹지 않고 삼킨 밥처럼 가슴에 얹혀버린 시간들을 이제 와서야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우산을 챙길까 생각하다가 그만두고 사과박스를 짊어진 채로 집을 나왔다.
충무로 역 앞에 사과박스를 내려놓고 전단지 묶음을 안아든다.
12월 초답게 제법 매운 바람이 분다. 맞은편에서는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좌판에서 행운의 부적이 달린 목걸이를 팔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듯 전단지를 건넨다.
좌판의 여자는 나를 흘끗거리더니 어깨를 움츠리고 자라처럼 점퍼 안에 목을 묻었다. 나는 윤기가 반지르르한 찜닭과 함께 아마추어 모델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전단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받지 마, 받지 마, 다 쓰레기만 돼.”
번개 맞은 헤어스타일의 남자가 전단지에 손을 내밀자 옆에 코알라처럼 남자의 팔에 매달려 있던 여자가 쫑알거린다.
자신에게 필요 없는 것들은 모두 쓰레기인가… 내게 있어 쓰레기가 될만한 것들을 떠올려 본다. Y에게서 받은 쥐 모양 열쇠고리, 먼지만 쌓여있는 커플 찻잔, 그리고 지금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있는 이 시간…
“예약돼요?”
소매가 닳은 보라색 점퍼를 입은 50대 중반쯤의 여자가 전단지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묻는다.
"아마 될 겁니다.“
나는 구겨진 점퍼자락에 붙은 흰 머리카락을 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일까.
“내가 고등학교 동창회가 있거든.. 그래서 모임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요즘 찜닭이 한창이라고 해서 먹어볼까 하고…”
여자는 몇 분 동안 말없이 전단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한 쪽 눈을 찡그리고 소리 낮춰 묻는다.
“근데… 솔직히… 맛은 있어요?”
고등학교 때 내 꿈은 카운슬러가 되는 것이었다. 회전의자에 앉아 책상 가득 상담 신청서를 쌓아두고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며 상담 스케줄을 잡는 것이다. 고객이 자신의 고민을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도록 헐렁헐렁한 말을 꾸며내려면 약간 머리가 아플지도 모르지. 그럴 때면 사무실 구석 수족관 안의 열대어들에게 모이를 주며 음악을 듣는다. 모차르트나 쇼팽의 클래식도 괜찮겠지만 아무래도 분위기에 어울리는 팝송이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은 때때로 누군가가 자신의 나약하고 헐거운 생각에 못을 박아주길 원한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여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전단지를 다시 돌려주고 휑하니 가버린다. 건너편의 좌판의 여자가 나를 보며 피식거린다. …… 누군가에게 웃음을 선사해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모자와 코트, 구두를 모두 빨간색으로 맞춰 입은 꼬마가 지나간다. 마치 커다란 떡볶이가 걸어가는 것 같다. 3호선이라는 기다란 내장(內臟)을 삼키고 있는 지하철역 2번 입구는 땅이 호흡하기 위해 벌리고 있는 입 같다. 사람들은 땅의 편도선을 밟으며 지하로 내려간다.
우리 가족은 비탈진의 골목 벽에 헝겊 조각을 대충 붙여놓은 듯한 대문 안에서 살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슬레이트 지붕은 요란하게 아픔을 호소하였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벽으로 흘러 내려오는 물기를 닦아내었다. 없는 형편에 사업이라고 시작했다가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 아버지는 방구석에 웅크린 채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이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여동생 둘과 나와 어머니는 번갈아 동네 슈퍼 아주머니의 눈총을 받으며 외상을 달아야만 했다.
나는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에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새벽 네 시, 거리의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나는 한 달 후 내 손에 쥐어질 하얀 봉투를 생각하며 힘주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밤새 아스팔트 위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던 가로등이 하나 둘 씩 꺼져 갔고 토스트나 삶은 계란을 파는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다리가 휘어진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고 둘둘 말려있던 주홍색 천막을 풀어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한 달 뒤 난생처음 내 손으로 번 돈을 들고 집으로 뛰어가 좁은 마당에 서서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방문을 열고 나오더니 마루에 선 채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자신 있게 흰 봉투를 내밀었다. 순간 아버지는 봉투를 낚아채 찢어버리고는 마당으로 내려와 나를 내동댕이쳤다. 여동생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는 욕을 퍼부으며 발길질을 하고는 씩씩거리다가 마당 구석에 쌓여있던 중간 크기의 간장독을 내 머리 위로 번쩍 쳐들었다.
“아버지!”
나는 간장을 뒤집어쓴 채 골목으로 뛰쳐나왔다. 몸에 박힌 사기조각들이 아프게 살 속을 비집고 들어와 그대로 내 몸 속에서 삭아 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전봇대가 뿜어놓은 전선이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지붕들 위로 어지럽게 얽혀 있다. 지붕들이 하늘로 솟는 것을 막기 위해 쳐 놓은 그물처럼.
“그런 것 좀 안 돌릴 수 없어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들이 어깨에 환경보호 휘장을 두르고 우르르 몰려와 앙칼지게 따진다. 나는 안고 있던 전단지 뭉치와 여자애들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 종이 한 장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희생되는 줄 아시나요? 저기 옆에 있는 쓰레기통 좀 보세요. 이 전단지들이 구김도 없이 그대로 버려져 있다구요. 이런 낭비가 어디 있어요?”
여자애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이번에는 타이르는 투로 덧붙인다.
“환경을 보호해야지요.”
아이들 무리가 우르르 다른 쪽으로 몰려가자 뒤쪽에 서 있던 여자애가 와서 환경파괴의 심각성에 관한 팜플렛을 한 장 주고 총총히 사라진다.
나는 ‘환경을 보호하는’ 여자애들이 주고 간 팜플렛을 들여다보다가 두 번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시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했다. 사과상자가 반쯤 비어간다.
다리도 아프고 해서 상자를 질질 끌고 바로 옆의 버스 정류장에 있는 좁은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가 조일 만큼 불편한 이 의자는 사람을 앉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의 기다림을 그럴싸하게 장식하기 위해 놓여진 것 같다.
나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전단지를 집어 배와 학을 접었다. 56번 버스가 하품을 하며 코앞의 도로를 기어간다. …… 내게는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Y는 어두운 바를 좋아한다.
Y는 독수리 문양이 박혀 있는 테이블에 앉아 B&B라는 루비색이 나는 칵테일을 마시며 담뱃재가 아찔하게 타들어 갈 만큼 필터를 빨아들였다.
“아는 언니랑 같이 살게 됐어. 젠장, 너랑 같이 살고 싶었는데 말이야. 글쎄 어젯밤 갑자기 짐을 싸들고 찾아온 거야. 아, 짜증나..”
그녀는 유리잔에 입술을 대고 칵테일을 한 모금 삼켰다. 술의 색이 워낙 맑고 붉어서인지 그녀의 죽은 장밋빛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초라해 보인다.
“나는 B&B가 좋아. 달면서도 혀끝을 꽉 죄는 것 같이 강한 맛이 난다니까.. 너도 한잔하지 그래? 아참 그래 너는 술을 안 마시지. 흠. 그런데 너 이게 왜 B&B인 줄 알아? 베네딕틴과 브랜디의 이니셜을 따서 만든 이름이거든. 베네딕틴 15ml, 브랜디 15ml이 잘 섞여져서 만든 새 생명의 술이라고.. 어쩜 이렇게 조화로운 맛이 날 수가 있을까? 너랑은 아주 딴판이야. 너처럼 아무 맛도, 아무 색도 나지 않는 인간은 세상 그 어떤 좋은 것을 옆에 갖다 놓는다고 해도 ‘조화’라는 것을 이룰 수가 없다고.. 알아?”
Y의 까만 눈동자가 흐릿하게 번져있다. 나는 무알콜 칵테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Y는 그 호칭을 거부했지만-가 버리고 간 고아원에서 뛰쳐나와 다방에서 레지로 일하다가 지금은 외진 바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Y의 복숭아색 볼을 보고 있으면 첫째 여동생이 떠오른다. 그 애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와 다투고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가기 전에 내게 편지를 남겼었는데 집과 가족과 우울하기만 한 저 하늘이 지긋지긋해서 떠난다고 했다. 그 애는 반항적이었다. 반항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제재와 보살핌 아래 있을 때서만 부릴 수 있는 투정이다. 다른 애들과 달리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 일도 없었고 말썽도 일으키지 않는 조용한 아이였다. 하지만 내게 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반항적이었다. 서슴없이 욕을 뱉어내고 담배 갑을 꺼내 보이고 내 손을 뿌리치며 잔소리하지 말라는 악을 쓰기도 했다.
Y도 그 애도 지붕을 잃은 채 살고 있다. 나는 지붕까지는 못되더라도 우산 정도는 되어주고 싶었다. 동생이 집을 나갈 때쯤 아버지는 청소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홍빛 유니폼을 걸치고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새벽같이 나가서는 밤이 늦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지구는 역삼각형이야.”
Y는 아몬드가 박힌 초콜릿을 먹으며 중얼거린다.
“타이타닉호가 동강났을 때 배 난간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사람들 기억나지? 다 그렇게 역삼각형의 널찍한 꼭대기에 아등바등 붙어서 살고 있다고. 뭐 자기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말야… 나는 난간을 놓쳤어. 불안정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중이지. 하지만 그렇게 나쁜 것 같진 않아. 떨어지면 꼭지점을 뚫고 우주로 튀어나갈 생각이니까…”
Y가 마른 오징어를 집던 내 손을 쥐더니 자기 이마에 갖다 댄다.
주머니 속 핸드폰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Y의 감상적인 분위기를 깨고싶지도 않았거니와 그녀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이마의 느낌이 좋아 왼손으로 핸드폰 배터리를 뺐다.
흘러나오던 재즈음악이 잠시 끊겼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집을 떠났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 같이 쉽게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는 닥치는 대로 비집고 들어갔다. 돈이 될 수 있는 것에는 무조건 매달려왔다. 생존 이외의 것을 생각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집을 나온 지 3년이 지났다.
하늘이 뭉클거리더니 기어코 소낙비가 쏟아졌다.
Y를 골목 앞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선다. Y는 우산을 가지고 나온다고 했지만 어차피 흠뻑 젖어버렸다. 틈이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빗줄기가 점점 사나워진다. CJ의 말대로, 멍청한 하늘이 실연을 당한 것일까. 이별 후에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헤어짐 자체가 슬퍼서일까 아니면 홀로 남아 견뎌야 할 외로움이 두려워서 일까…
새벽 한 시다. 근처 건물의 간판 아래 잠깐 비를 피하며 담배갑을 꺼낸다.
담배는 물을 잔뜩 먹고 축 늘어져 있었다.
이렇게 흠뻑 젖은 채로 택시를 잡기란 쉽지 않을텐데… 버스도 끊긴 시각이다.
나는 건물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초바늘이 꿈틀거릴 때마다 어둠의 두께가 한 겹씩 두꺼워진다. 누군가에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 네시 반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라디오를 틀자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나는 첫째 여동생과 마당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집안으로는 빗물이 고여든다. 여동생은 내 팔을 붙잡은 채 떨고 있었다. 무섭니? 내가 물었다. 아니, 저거. 여동생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집 앞 푸른 화분에 심어놓은 봉숭아 한 줄기를 가리킨다. 집안에서는 어머니가, 고여드는 물을 닦고 있다. 물이 빠른 속도로 차오른다. 아버지는 청소부 옷을 입은 채 곰팡이 핀 벽에 붙어 자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다. 늘 그렇듯, 죽은 듯이. 물은 어머니의 앉은 무릎까지 차오른다. 어머니는 걸레를 내려놓고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방구석에 기대어 앉아 있다. 어머니, 우세요?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물은 어머니의 가슴께 까지 차 오른다. 제발 나오세요!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몸이 잠긴다. 동생은 꺾어진 봉숭아 줄기를 쳐다보며 울부짖는다. 동생은 꺾어진 봉숭아에서 핏방울처럼 떨어져 내린 붉은 꽃잎들을 정신없이 주워 담는다. 아버지.
그는 물속에 잠겨서도 꼼짝 않고 벽을 향해 돌아누워 있다.
동생이 양손 수북히 물에 젖은 꽃잎을 들고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머리를 쇠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 전화기를 더듬었다. Y일 것이다. 언제나처럼 늦은 응답에 앙칼진 목소리를 던질 것이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나는 이불을 발로 차고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침부터 장난 전화인가?
“오빠…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화장터가 그렇게 엄숙하고 깨끗할 줄은 몰랐다. 국화꽃으로 장식된 그의 마른 얼굴이 초췌해 보인다. 몇 년만에 보는 첫째 동생이 내 옷깃을 붙잡고 흐느낀다. 어머니는 운반되는 그의 관 위에 손을 얹은 채로 멍하니 걷고 있었다. 그는 관 속에서도 벽을 보고 돌아누운 채 누워 있을까.. 화장될 순서가 올 때까지 이승에서의 남은 기억을 하얗게 얼려 부셔버려야 할 그는 냉동실로 들여보내졌다. 나는 낯선 친척이 건넨 자판기 커피를 들고 고요한 호텔로비를 연상시키는 라운지의 의자에 앉았다. 종이컵 위로 피어오르는 김이 내 안으로 들어와 부옇게 서리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두껍게 가로막혀 있던 유리벽 위로. 유리벽 너머로 당신의 키 만한 빗자루를 들고 있는 그가 보인다. 그는 한참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멀어진다. 가슴속 오래된 우물의 두레박이 삐그덕 거렸다.
우물 안 벽에 아버지의 눈에서 피어오른 듯한 잡초들이 나 있다.
나는 끝내 두레박을 내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커다란 열광로 안에서 두 시간 반 동안 지친 육신을 털어 버리고 있었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창에 얼굴을 대고 직원이 폐품 종이를 정리하듯 무표정한 얼굴로 새하얀 유골을 쓸어 담는 것을 지켜보았다.
“예전에는 저 유골 분쇄하는 데 돈 꽤 들었지. 왜, 좀 섭섭하게 먹이면 군데군데 조각난 뼈가 그대로 보이도록 갈아놨잖아. 심했어.”
“맞아, 나도 기억나는군. 그때 보니까 분쇄하는데 돈 좀 깨지던데. 세상 많이 좋아진 거지. 예전엔 시설이 이렇게 좋기나 했나. 대충 태우고 갈아서 저 아래 물가에 뿌리면 그만이었지..”
“말이 나오니 얘긴데. 그 물가에 미꾸라지 맛이 죽인다고 하던데. 가는 길에 추어탕이나 한 그릇씩 하고 갈까?”
“좋지, 좋아.”
뒤편에 서 있던 몇 명의 사내들이 입맛을 다시며 허리춤을 추켜 올린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은 조용했다.
어머니는 무거운 공기보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 아버지. 죽기 전날까지 빗자루 들고 나가서 우리 골목 앞을 하루 종일 쓸고 또 쓸었어. 쓰레기도 하나 없는 땅에 끊임없이 비질을 해댔어. 떠날 시간을 알고 있었던 것 처럼 사람 시켜서 수도관도 메워놓고. 그런데 너. 어제 한참 전화해도 받지를 않더라. 핸드폰인가. 그것도 꺼져 있고. 네 아버지 임종 때 너는. 어디에 있었던 거냐?”
내가 어디에. 나는 잘.
모르겠어요, 어머니. 아무것도.
.......................
우습게도, 지구는 둥글다. 그것은 낙하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조건 빙글빙글 돌아야 한다.
회전을 하다가 지친 수 많은 사람들이 바람에 쓸리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지구에서 소멸 되어도, 남아있는 자들은 멈춰서는 안 된다. 바람이 탱탱하게 찬 공 위에 올라가 걸음을 떼는 피에로처럼, 쉴 새 없이 공을 굴려야만 한다. 컬러풀한 공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 속으로 들어가 공을 굴릴 것이다. 일정한 원 안에서....
“사랑해.”
Y가 말했다. 어깨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군용가방을 매었고 긴 머리는 아무렇게나 올려 하나로 묶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맛의 사탕처럼 여러 가지 색의 매니큐어를 바른 긴 손톱으로 턱을 긁적이더니 가방에서 시커먼 야구 모자를 꺼낸다.
“나 떠날거야.”
모자를 푹, 눌러쓰며 탱탱 튀는 고무공처럼 Y는 자신 있게 말한다. 새벽 6시의 방문에 나는 안개처럼 자욱한 졸음을 휘이 저어 내쫓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디로?”
“멋지게 추락할 만한 땅을 알아보러..”
그녀는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서울역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
새벽빛을 부수는 버스를 타고,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Y는 역에 도착하자마자 창구에 가서 아무 표나 끊고는 참새처럼 즐겁게 내 곁으로 튀어왔다. 나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10분 후에 떠날거야.”
그녀가 말했다.
“언제 올 거야?”
“안 올거야, 영원히.. 말했잖아, 추락할 거라고.”
Y가 웃으며 말한다. 그 웃음이 지독하게 붉은 봉숭아 꽃잎을 닮았다. 그녀는 매점에서 캔 커피와 마른 오징어를 사 들고 개찰구 앞에 선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Y가 드라마에서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손을 흔들며 개찰구를 지나 계단을 내려간다.
이내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Y는 돌아올 것이다. 여동생처럼, 무언가를 잃은 후에야… 원 안으로 공을 굴리며…
지구는 둥글기에 그녀는 추락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적어도.. 이곳 메리고라운드에서는.
돌아서서 서울역을 나오며 마른 담배를 입에 문다.
하늘이 흘린 웃음이 점점이 새털구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라이터를 꺼내며 다시 재빠르게, 공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