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장의 공문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간호협회에서 주최하는 간호문학 및 간호사진 공모전. 주제는 감동적인 순간, 현장의 이야기, 돌봄의 의미. 어디서나 들을 법한 평범한 문구였지만, 이상하게 내 마음이 멈춰 섰다. 그 순간, 오래전의 그날이 떠올랐다. 왜였을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문득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렇게, 그날의 기억을 꺼내어 다시 마주하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이 공모전에 참여하게 된 시작이었다.
그날은 내가 4년 차 간호사였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이브닝 근무를 준비하며 속으로 ‘오늘은 제발 신환만 오지 말아라… 오려면 데이 때 다 와 있어라…’ 하고 이기적인 소원을 빌고 있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정신없이 일하다 외래에서 환자 한 분을 모셔드리고 병동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한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부가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계셨다. 그분들은 평소에도 복도를 오가며 나를 유심히 보시던 분들이라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내가 지나가면 말을 걸 듯, 말 듯 하시다가 결국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시선만 내게 머물렀다. 결국 나는 먼저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혹시 도와드릴 일 있으세요?”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이 간호사가 맞아!!”
순간,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이지? 내가 실수라도 한 걸까? 나름 친절하다고 자부하며 일하고 있었기에 더 놀라웠다. 잠시 후, 할머니께서 내 손을 꼭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가 증손주들 사진도 안 넣는 지갑에 선생님 사진을 넣고 다니세요. 증손주들한테 자랑도 하신답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주머니에서 꼬깃한 지갑을 꺼내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셨다.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는 루돌프 머리띠를 쓴 내 모습과, 산타 모자를 쓰고 머리 위로 커다란 하트를 그리고 있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사진 한켠에는 내가 쓴 글씨가 있었다. “2011년 12월 25일, 메리 크리스마스♥”
그 순간, 나도 울컥했다. 내겐 그저 소소한 이벤트였던 하루가 누군가에겐 큰 위로이자 감동의 기억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그날은 동기들의 장난으로 나이트 근무 지원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던 날이었다. 억울했지만 이미 근무표는 확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병원에서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동기들에게 루돌프 머리띠, 산타 모자, 조그마한 트리를 준비해 병동에서 작은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날 우리는 머리띠를 쓰고 병실마다 다니며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를 드렸다. 대부분의 환자분들이 손주들의 재롱을 보는 듯 따뜻한 미소로 화답하셨다.
그중 몇몇 환자분들과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드렸고, 그 사진 중 하나가 바로 그날의 사진이었다. 1년 후, 그 사진을 지갑 속에 고이 간직한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할머니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날 이후로 할아버지는 우울증이 와서 거의 웃질 않으셨는데, 이 사진을 보면 혼자 웃으세요. 손주들한테도 자랑하시고요.” 오늘은 꼭 인사드리고 싶다며 병원에 세 번째로 찾아오셨다고 했다. 오전에 데이 근무 얼굴을 확인하고 없길래, 이브닝까지 기다리셨다고 한다. “제가 언제 출근할 줄 알고 이렇게 기다리셨어요!” 하며 웃자,
할아버지께서는 “집에 가봤자 할 일도 없으니 괜찮다”며 허허 웃으셨다.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께서 꼬깃꼬깃 접힌 오만원 한 장을 내 주머니에 넣으려 하셨다. 나는 급히 그 돈을 다시 할아버지 손에 쥐어드리며 말했다. “아이고~ 할아버지, 저 이 돈 받으면 윗사람한테 혼나요~ 큰일 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그럼 안되지! 안되지!” 하시며 아쉬운 눈빛으로 손을 거두셨다. 옆에 계시던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가 병원 올 때마다 챙겨오신 쌈짓돈이라며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두 분께 집에 돌아가시는 길에 맛있는 걸 사 드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때 나는 두 분이 보여주신 따뜻한 마음 덕분에 이미 억만금의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두 분은 일하는 데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나셨고,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도 끝까지 소리쳤다. “할아버지, 할머니 감사합니다!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복도 끝으로 사라지기 전, 두 분은 뒤돌아 몇 번이고 내게 손을 흔드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날 이후,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환자에게 어떤 간호사가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간호사로 기억될 것인가?’ 이 물음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려, 내가 환자를 돌볼 때마다 중심이 되어주었고, 현장에서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병원은 우리에게 그저 평범한 일터일지 모른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희망이 사라지고, 두려움과 아픔만이 깃든 공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억을 바꿔줄 수 있다. 차갑고 메마른 병원을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으로 바꾸는 일, 그건 결코 거창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사소한 말투 하나, 짧은 위로의 한마디, 조심스러운 손길 하나면 충분하다. 문득 나는 그날의 병실을 떠올렸다. 서로를 위로하며 웃던 환자들의 재잘거림, 머리띠를 바라보며 “나도 한 번 써볼까?” 하며 웃던 얼굴들. 그 따뜻한 순간들을 잊고 지냈던 나를, 그날의 기억이 다시 일깨워주었다.
간호란, 생명을 돌보는 일 이기 전에 누군가의 하루를 따뜻하게 기억될 수 있게 하는 일임을.